2021. 9. 16. 07:50

神德王立 姓朴氏 諱景暉 阿達羅王遠孫 
[중략] 孝恭王薨 無子 爲國人推戴 卽位 
(912년, 신라 53대) 신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성은 박씨고 이름은 경휘니(8대)  아달라왕의 먼 후손이다
(52대) 효공왕 (金氏)이 아들없이 죽으므로, 나라사람들이 추대하여 보위에 올랐다.
 - 삼국사기 신덕왕조의 기사이다.

천년 신라왕국에서 우리는 역사를 통해 김,박,석 세성씨가 번갈아 왕위를 이어갔다고 두루뭉수르 넘어가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위의 자리는 항상 치열한 권력쟁탈전과 피비린내 나는 일족간의 살육의 제사를 거치게 마련임은 상식에 속할 터.
그냥 막연히, 세 성씨간의 평화로운 정권교체나 정권의 나누기가 가능했다고 보는것은 어디까지나, 당대 역시 사람이 사는 사회 였다는걸 망각하곤 고대인들의 수준을 한수 아래로 보는 오늘날의 시건방진 시각은 아닐른지.   

신라의 왕족은 세 성씨로 
1. 신라 시조로 난생 설화(BC 69)를 가진 박혁거세 계통의 박씨,
2. 그리고 외국태생(다파나국 多婆那國)으로 궤짝 + 난생설화(BC 19)를 지닌 석탈해 계통의 석씨,
3. 역시 마찬가지 금궤 설화 + 계림비화(AD 65) 를 지닌 김알지 계통의 김씨 이 셋이다.
공통적으로 평범한 출생의 기록을 가지지 않은 이 세 성씨의 탄생설화는. 각 씨족부락 출신의 후대 집권세력들의 일종의 배타적인 권력성향으로 왕족일원의 탄생 자체를 일반적인 것과는 달리하고자 하여, 그 배타적 권력을 독점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로 볼 수 있다 해야 하나.

각설하고, 초대 박 혁거세이후  2대 남해차차웅의 사위에 해당하는 4대 석탈해와 함께 8대 아달라 이사금(재위 154-184)까지 박씨는 석씨와 권력을 대체로 나누어 가져 내려왔다.   일부러 분점해 내려오진 않았을 터.  이는 당대 신라의 국력 전반이, 강력한 왕권을 가진 사회라기 보다는 부족연맹 개념의 느슨한 대군장 정도의 권력을 유지한 사회적 한계와 특성을 반영해야 한다고 보여진다.  9대 벌휴 이사금 (184-196년) 부터 박씨 왕조는 더이상 신라 역사속에 왕위를 잇지 못한다.  
벌휴이사금 부터 12대 첨해이사금까지 (184~262) 석씨왕조를 계통을 이어가다가 13대 미추이사금 (262-284)대에 이르러서야, 신라왕조 최초로 김알지의 7대손인 (김미추)가 김씨 왕조를 열게 된다.
물론 아직까지는 김씨 독점왕조를 열지 못하기에 신라 중하대 왕의 계보에서 미추왕은 왕조의 시조로 인정받지 못한다. 
김씨 독점 왕조를 확립한 왕은 17대 내물마립간(재위 356-402)부터 이다 
이 당시도 역시, 왕명은 대군장을 뜻하는 마립간으로 직전 이사금,잇금 (현명한 연장자의 개념)에 비하여 약간 더 큰 권력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으나.  고대 왕권의 기틀은 다지지 못한 강력한 부족연맹국 정도로 보여진다.   이때 이르러서야 기존 경주 인근의 강역에서 벗어나 낙동강 유역을 손에 넣었으니...
(오늘날처럼 국경선이라고 따로 존재할 수도 없고, 말뚝 박고 여기부턴 내땅 할 수도 없는 마당에.  나라의 강역이란것은 어디까지나 그 나라의 국력이 통치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역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라 봐야 한다.)

이 시기 부터 점차 고대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가기 시작하는 신라는 아직까지 개국이래 지속되었던 왜구의 침략과(광개토왕의 왜구격퇴를 위한 신라 도움이 이 시기 이뤄진다) 백제와의 일진일퇴로 큰 세력으로 성장하지는 못했지만, 우리가 경주 왕릉군을 보아온 대규모 군장세력으로써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왕릉을 만들던 시기가 이시기 이후로 정립됨을 보았을때.    내물마립간 이후의 신라의 국력과 생산력 군사력과 문화적 수준은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된다.     물론, 이 시기 이후 고구려장수왕의 남하정책 시기와 맞물리고 오랜 숙적 백제와의 전쟁으로 친고구려 정책을 펼치다가 지나친 고구려의 팽창을 경계하면서 백제와의 친선을 도모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제 비로소, 김씨 독점 부자승계의 전통을 확립하게 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신라 왕조는 엄격한 골품제 전통을 (정확한 근거를 가진것은 아니나 이해하기로는 엄격한 골품의 전통 역시, 이시기 즉, 내물왕 이후로 보여진다)가지고 있었으며. 성골 출신의 왕의 대물림을 계속해 왔다.
말이 좋아 성골출신의 왕위 계승이지...   좀 빼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면, 근친혼(당대 말로는 족내혼)의 전통을 가졌다고 이야기 해야 옳은바...   
(실제 중국 왕조들에게 아부하기 시작하는 진흥왕조 이후의 기사들을 보다 보면, 은연중에 족내혼의 전통을 부끄러워하는 기록들을 종종 보게된다)
오늘날의 의학적 상식으로도 그렇고, 실제 역사속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예를 보아도 그렇고.  근친혼은 열성 유전자의 대물림으로 인해 유전적인 질병을 일으키게 마련.
수백년 내려오는 근친혼 (삼촌과 조카딸이 결혼하고 그 아이가 다시 사촌여동생과 결혼하고...)의 방식이 성골 남자의 씨를 말리는건 상식에 아닐른지. 

해서 나오게 된 왕조가, 진골 출신 태종무열왕이 되겠다.
이후의 왕조는 진골출신의 김씨왕조가 신라의 말기까지 지속되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끝인줄 알았다.  누구도 짚어주지 않기에...

삼국사기를 읽다가.  화들짝 놀란 사실은.  이제 본격적인 궁예/견훤간의 공방전이 지속중이던 후삼국 시대의 한복판,  다시금 무려 700년의 세월을 역사 뒷편에 숨어 살아왔던 박씨가 다시 신라의 왕으로 등장하게 된것이다.

이후 54대 경명왕 55대 경애왕까지 박씨 왕조는 3대 15년간 이어지다가.
55대 경애왕(성명, 박위웅 제위 : 924-927)이 경주로 침입한 견훤에게 자결을 강요당하여 죽음으로써 마감된다.

물론 마지막 신라의 왕은 다시 김씨다.  고려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들어바친 경순왕은  46대 문성왕 (839-857)의 후손으로  이름이 김부 되겠다.

당대의 사료가 별로 없음으로 인해 정확도도 많이 떨어지고 중국사서의 귀퉁이의 별전형태를 짜집기 하여 만든 삼국사기나 설화와 구전되어 내려오는 전승을 기록한 삼국유사를 토대로 재구성한 당대의 역사 속에서는 정확한 당대의 권력계승의 일면을 파악하긴 어려우나...

미루짐작...  역사의 기록속에 한대 한대 왕의 계승을 둘러싼 유력 왕위 계승권자들과 고위귀족 세력들간의 알력 다툼 그리고 그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의 현장을 참 편하게 바라본다.   누구누구 왕의 후손이 없었으므로 나라사람이 추대하여 누구를 왕위로 올렸다.  라는 문장하나로.

물론, 삼국사기 본기 대목에서도 권력 투쟁의 과정을 비교적 상세히 기술한 왕들도 몇몇 보이긴하다.  그러나 기껏해야 10여명의 왕들의 권력 쟁탈전만 구체적으로 보일뿐, 천년 역사속에 벌어진 비극적 양상은 오늘날 정확히 알 방법은 없다.  그나마도, 당대에 천민 노예로, 또 통일전쟁이란 미명아래 군졸이나 군속으로 동원되어 희생된 많은 이땅의 선조들의 입장에선... 그래봐야 윗 것들의 권력 놀음일 뿐! 그 분들의 삶과는 하등 관련없는 일이었겠지만...

 
* 덧붙이는 상상.
경애왕 박위웅씨는..  포석정에서 비빈들과 노닐다가.  경주도성으로 치쳐들어온 견훤에 의하여 자결을 강요받고 죽는다.
박위웅씨라고 했다고 뭐라 하실분 계신가...   그럼 뭐라고 하는가...
근데 박위웅씨를 위한 변론하나만 하고 싶다.

정통 사학계에서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는 異說로 취급 받기는 하지만.
나 역시 역사서를 읽으며 좀 꺄우뚱 하는 생각이 든다.

경주에 가보셨겠지만서도.   포석정지는 그냥 놀고마시는 그런 곳만이 아니었다.  신성한 산인 경주남산의 신령들과 조상들에게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물론 포석정의 유적만 봐서는 분명 유상곡수(流觴曲水) 즉 술잔을 띄워놓고 시를 읆으며 연회를 하던 장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당대의 유상곡수宴의 전통은 사실 백제에서도 중국에서도 모르긴 모르되 고구려에서도 다른 형태로 이뤄지던 것 아닐른지...  심지어 그것은 후대 왕조 고려에도 마찬가지일터
유독, 신라 포석정의 비사만이 강조되는 것은...   
후대 고려왕조의 역성혁명을 정당화 하기위한 모종의 왜곡의 현상은 아니었을지...

물론 가정이지만, 걸판지게 놀아 났다 한들 그 놀아남이...  과연 흥청망청 노는 행사였는지 아니면, 지급에 닥친 위기를 조상의 음덕에 기대 보위하고자 싶은 경애왕의 지성소 방문이후 음복의 자리였었는지... 아무도 증언해 줄 사람은 없는거 아니겠는가?
당시 927년 음력 9월~11월의 상황은 견훤의 군대가 대구 동쪽의 영천 지역 쳐들어와 다급하게 왕건에게 구원병을 요청하였던 상황이었던 바...

아무리 못난 왕이었다 한들, 불과 수십킬로 앞까지 지쳐 들어온 적을 앞두고.  포석정 가서 놀아났다?
그것도  꽃 피고, 새 우는 춘삼월도 아닌 음력 11월에??   
음력 11월이면 한겨울 12월~1월이 아니던가.
오들오들 떨면서 (포석정에 정자나 집이 있었다는 가정이라면 모를까.) 현재 남아있는 유적지의 모습을 보았을 때, 건물안에 들어가 있는 시설이라 보기엔...  좀 그러할 진대.
그럼 동지섯달 차가운 바람속에  꽁꽁 얼었을지도 모를 차가운 물에 술잔 띄워놓고 그 술 먹으면... 기분이 나려나?    
오히려 이쯤되면 극기훈련하러 갔다고 봐야 옳지 않겠는가??

패자는 말이 없는 법이고, 승자 위주로 적힌 역사에서.
패자는 그저 도덕적으로 문란하고 문제있는 군주여야만 하는거 아닌가 라는 
발칙한 변론을 마지막으로   박씨 성을 가진 마지막 신라왕 박위웅씨의 명복을 빌어본다.

Posted by 무명씨